오랜만의 여유로운 일요일이라 미뤄두었던 일본 취업 포스팅을 올려보기로 했다. 최근 내 블로그를 찾는 분들이 가장 관심을 갖고 보는 내용 역시 일본 취업인 것 같기도 하고.. 코로나의 여파로 국경을 넘는 것 자체가 어려워진 시국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생활, 일본 개발자 취업은 나를 포함한 많은 분들이 매력을 느끼는 포인트인 것 같다. (다행히 3월부터는 비즈니스 목적의 비자를 소지한 사람들에 한해 일본 입국이 풀릴 전망이라고 한다.)
지난 포스팅 (아래)를 보신 분들이라면 "그래서 도대체 어떤 회사를 간거냐" 고 궁금해할지도 모르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3. 파견회사 B를 선택했다.
2021.08.29 - [엔지니어/일본취업] - 늦깎이 비전공자의 터닝 포인트 일본취업 - 내가 만난 IT 회사들 (2)
이제는 전직장이 되어버린 곳이기는 하지만, 내 생에 첫 외국기업(일본 기업)이었기에 새로운 점이 많았었고 오늘은 그 점에 대해 적어보려고 한다. 비교적 높은 월급을 제시한 다른 기업을 두고도 가장 낮은 월급의 B사를 선택한 이유는 잔업수당을 전액 지원한다는 점과 외국인 엔지니어가 많았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그 두 가지 이유는 내가 입사 후 가장 만족했던 부분이 되기도 했다.
지겨웠던 연수기간
일본에서의 첫 생활은 여행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당장 출퇴근을 시작하면서는 9시부터 6시까지 회사에 묶인 신세가 되었다. 첫 3개월간은 연수기간이다. 많은 수식어 중에서도 지겨웠다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정말로 지겨웠기 때문이다. 신입사원 연수 기간 동안 지나칠 정도로 철저히 트레이닝을 시키는 기업이 있는가 하면, 거의 방치하다시피 두는 기업도 있는데 B사는 후자였다. 물론 초반부에는 일본 정착을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처리해야 할 행정 업무들이 많았지만 두 달 째부터는 출근을 해도 딱히 해야 할 일이 없어 무료하기까지 했다. 당시 회사에서 제안했던 IT Passport (아이티 패스포트)라는 기본 자격증 시험을 공부하거나 인터넷으로 무료 강의를 찾아서 듣거나 하는 것이 3개월짜리 연수 기간의 전부였다. 만약 일본에 취업하실 분들이 있다면, 이 3개월 기간 동안 선후배들의 이야기를 최대한 많이 들어보고 회사의 전망을 잘 파악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또 가장 여유로운 이 기간을 활용해서 자격증 시험이나 앞으로 더 공부하고 싶었던 개발 관련 지식을 많이 쌓아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파견회사 면담준비
3개월의 연수기간이 끝날 때 쯤, 슬슬 파견을 하기 위한 면담을 준비한다. 다른 기업에 입사한 친구의 경우에는 2개월 만에 바로 현장 근무를 시작했는데 회사 간의 커넥션이 탄탄한 데다, 선배 사원들이 다수 근무하고 있는 곳이라 가능했던 특이한 케이스라고 했다. 하지만 내 경우는 이력서와 스킬 시트를 재정비해서 다시 파견처 면담을 봐야만 했다. 면담은 회사에서 많은 부분을 서포트해주기 때문에 채용 면접을 보는 것처럼 어렵지는 않았다. 파견처 회사의 프로젝트 관리자를 만나 어떤 프로그래밍 언어를 다루었는지, 어떤 개발 경험이 있는지를 꽤 편안한 분위기에서 간단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요코하마 현장 파견
내가 파견을 갔던 회사는 요코하마에 있는 시스템 개발 회사였다. 그 회사에서는 일본 대기업 전기회사에서 수주받은 프로젝트에 참가했는데, C언어로 쓰인 기존의 코드를 새로운 시스템에 맞게 수정/보완하는 것이 나의 주된 개발 업무였다. 당연하게도 나의 출근 장소는 요코하마의 현장이 되었고, 그때부터는 요코하마 회사의 직원들과 함께 근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파견의 파견인데, IT 기업에서는 이런 경우가 수두룩하기 때문에 딱히 불만을 느낄 요소가 되지는 않았다.
일본 회사의 특징 1. 자유롭고 수평적인 분위기
여기까지만 보면 일본 취업의 현실이란 꽤 따분하고 생각보다 별로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출근길에 대한 설렘을 매일매일 가족에게 알리느라 아침마다 영상 통화를 걸며 내 하루 일과가 얼마나 재미있는지를 소개하느라 바빴다. 그만큼 일본 회사의 분위기는 편안하고 즐거웠다.
우선 출근을 하면 프로젝트 리더와 함께 오늘 누가 어떤 일을 담당할지를 이야기 한 후 각자의 자리에서 개발을 시작한다. 신기했던 점은 부장, 과장을 비롯한 매니저 직급의 직원들에게서 권위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직급과 체계는 명확했지만 늘 내가 한 사람의 개발자로서 존중받는 기분이 들었다. 또 잘 모르는 코드나, 이해가 되지 않았던 업무 요건을 다시 물어봐야 할 때도 망설임 없이 질문할 수 있는 편안한 분위기라 어려운 프로젝트를 처음 시작하는데도 차근차근 이해하며 진행할 수 있었다.
비전공자가 어떻게 일을 시작하는지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았는데, 나는 C언어 코드의 기본적인 문법만 이해할 수 있는 정도였고, 프로젝트가 시작되면서 역할 분담이 명확해지면 그때그때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이해한 후 배우면서 일을 해 나갔다. 개발 능력과 스킬은 분명 중요한 요소지만, 업무 파악을 제대로 하고 리더와 소통을 원활히 할 수만 있다면 어떤 프로젝트든 배우면서 시작할 수 있다.
일본 회사의 특징 2. 점심은 따로, 자유롭게
출근하면 '전날 뭐했는지, 뭘 먹었는지, 요즘은 뭐가 재밌다더라, 오늘 퇴근하면 유니클로에서 뭐를 사야겠다' 하는 아이스브레이킹으로 일과를 시작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렇게 단란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일 하다가도 점심시간만 되면 각자 흩어진다는 거다. 한 시간의 짧은 점심시간에 야무지게 식당을 찾아 움직이던 한국에서의 직장 생활과는 달리, 대부분의 사람들이 편의점 도시락 혹은 라면으로 간단하게 먹고 때우는 경우가 많았다. 먹는 것을 중요시하는 나는 매번 꾸역꾸역 10분 정도 걸어 나가서 와쇼쿠(일식) 정식을 먹거나, 돈가스나 수프 카레, 라멘 등등을 찾아 먹느라 바빴지만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겨우 한 시간밖에 되지 않는 점심시간을 간단하게 먹고 낮잠을 자고 여유를 부리던 일본인 직원들의 눈에게 매번 분주하게 밖을 나갔다 오던 내가 더 이상하게 보였을 지도.
일본 회사의 특징 3. 사적인 영역은 절대 터치하지 않는다.
일본에서의 회사 생활을 만족스러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사생활을 절대 터치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한국에서는 처음 만나면 나이부터 묻고 누가 형일지 동생일지를 정하고 대화를 시작하겠지만, 일본에서는 일상생활에서는 물론 직장에서도 누군가에게 나이를 묻고 답해본 적이 없다. 내 옆자리에서 틈틈이 연애 상담을 했던 카즈나리 상의 나이는 함께 일한 지 몇 개월이 지난 후에야 우연히 알게 되었을 정도다. 그만큼 사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터치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스물다섯 이후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애인의 유무, 예정에도 없는 결혼 계획'에 대한 질문도 당연히 이곳에서는 용납되지 않는다. 일본에 오고 나서야 그런 질문들이 얼마나 무례한 것인지를 깨달았고 나 역시 언제부턴가 사람들의 나이나 결혼 유무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남자이고 여자이고, 더 나이 들고 어리고를 떠나서 우리는 같은 프로젝트를 이끌어나가는 하나의 팀일 뿐이니까. 성별과 나이는 정말 형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일본 회사의 특징 4. 휴가는 자유롭게
한국 직장 생활 경험과 비교했을 때, 일본에서의 휴가 사용은 꽤 자유로운 편이다. 여름 휴가는 물론, 3 연휴 (금요일 또는 월요일이 공휴일일 때 '금토일' 또는 '토일월' 3일을 연속으로 쉬는 날)에 자신의 휴가를 더 붙여서 긴 연휴를 보낼 수도 있다. 한국에서는 공휴일에 붙여서 휴가를 쓰면 눈치가 보이기도 했고, 실제로 휴가를 신청했다가 부장에게 불려 가 혼나는 직원을 본 적도 있었기에 처음에는 눈치가 꽤 많이 보였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휴가가 많은 윗사람들부터 길게 휴가를 신청하는 솔선수범의 모습을 보인다. 덕분에 나 역시 아무 이유 없이 휴가를 일주일 이상 쓰기도 했고, 그냥 몸이 좀 피곤하면 당일에 가차 없이 휴가를 날리기도 했다.
일본 회사의 특징 5. 의외로 공휴일이 많다
내 일본인 친구들은 한국보다 일본은 공휴일이 많은 편이라는 내 말에 뜨악 하는 표정을 짓곤 한다. 그들은 아마 일본은 일을 많이 하는 나라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OECD 주요국 연간 노동시간 한국 2285, 일본 1729라는 수치만 보아도 한국의 근무시간이 현저하게 높다. 하루 7시간을 근무한다고 생각해보면 약 80일 정도를 한국인이 더 일하는 수준이다. 일본은 나라에서 지정하는 공휴일은 한국과 비슷한 것 같은데 대체 휴일은 대부분 쉬는 편이다. '몇 월 며칠이 휴일'이라는 개념보다는 '몇째 주 월요일 혹은 몇째 주 금요일'을 휴일로 지정하는 경우가 많아서 더 길게 쉬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만약 월/수/금 이 공휴일인 경우에는 기업 차원에서 화/목을 휴일로 지정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덕분에 운이 좋으면 휴가를 쓰지 않고도 2주간 쉴 때도 있다. (오본 야스미, 5월의 골든위크, 연말연시가 그러하다) 가끔 일본에서 일해보지 않은 외국인 친구들이 '일본은 휴가도 쓰기 어렵고, 일만 열심히 하는 사회가 아니냐'는 질문을 하는데, 사실 일을 정말 많이 하는 나라는 한국이 세계 최고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한국에서 30여 년을 열심히 살아온 나에게 일본 직장 생활은 말 그대로 휴식에 가깝다. 조금 과장 보태자면, 여행하러 해외에 나왔는데 능력 발휘도 하고, 돈도 버는 그런 일석 삼조의 기분이랄까.
일본 회사의 특징 6. 회식은 1년에 1번
코로나 때문에 요즘은 한국에도 회식이 줄었다고 하지만, 일본은 코로나 전에도 거의 회식이 없었다. 연말에는 망년회를 부서 혹은 파트 단위로 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조금 특별한 경우다. 한국에서의 회식은 반강제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분위기였다면 일본은 약 한달 전부터 회식 일자에 대한 사전조사를 한다. 참가/불참, 그리고 가능한 날짜를 정해서 원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날짜에 참석하게 하는 것이 전부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참가했던 망년회에서는 야끼니꾸 집 코스요리였다. 그저 올 한 해 고생하셨습니다 하고 간빠이(건배)! 를 외치는 게 전부다. 그 이후에는 비싼 음식을 맛있게 회사 돈으로 먹고, 각자 취미나 연말/연시 계획을 얘기하다 끝이 난다. 회식 분위기가 지겨우면 그냥 핸드폰을 봐도 된다. 대각선 자리에 앉은 사원이 과장과 차장이 얘기를 하는 옆에서 등을 기대고 핸드폰 하는 모습이 나에겐 어찌나 낯설고 걱정되던지. '일본에서 이런 생각을 하다니, 내가 꼰대였구나' 하고 뒤늦게야 깨달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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