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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지니어/일본취업

어쩌다 비전공자인 나는 IT로 일본 취업을 하게 되었을까?

by Kyolee. 2021.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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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겨울. 나는 대학원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와 동시에 한국을 떠나기로 다짐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서른이 넘어서도 한국에서 이런 재미없는 생활을 계속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재미있게 사는 사람들은 많겠지만, 적어도 나는 한국에 있을 때보다 외국에 나가 있을 때 훨씬 자유로웠고, 즐거웠고, 눈치 보지 않고 나답게 살 수 있었다.

서른이 넘어도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계속 한국에서 일을 하는 건 과연 내가 꿈꿔온 삶이 맞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NO'라는 것을 나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막연한 것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을 뿐이었다. 20대의 내가 사회생활을 하며 숱하게 겪었던 편견이나 차별, 몸서리치게 싫었던 수직적인 구조, 연애니 결혼이니 출산이니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재단하려 들던 상황들. 그 기억들을 떠올리니 소름이 돋았다.

그래, 이렇게 살 수는 없어. 한번 뿐인 인생을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그렇지만 어떻게 해야하지? 이제 곧 서른인데 유학은 고사하고 워킹 홀리데이는 갈 수 있을까. 답답한 마음으로 며칠을 보냈다. 어느 날, 기분 전환을 하기 위해 들린 도서관에서 다음과 같은 제목의 책을 발견했다. '시시하게 살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마치, 시시하게 살고 있는 나를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고, 나는 홀린 듯이 이 책을 펼쳐 들었다.

2021.05.10 - [끄적끄적/Book] - 야마자키 마리 - 시시하게 살지 않겠습니다. (國境のない生き方 私をつくった本と旅)

그날 나는 하던 일도 제쳐두고 책을 읽어내려갔다. 마지막 한 장까지 읽은 후,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싶은지에 대해 처음으로 자유롭게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기로 했다. 부모님의 착한 딸이자, 말 잘 듣는 제자이자 남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자 스스로의 감정과 욕구를 숨긴 채 살아왔던 나 자신을 처음으로 마주한 순간이었다. 그 목록들을 기억나는 데로 더듬어보면 아래와 같다.

<지금부터 내가 하고 싶은 일>
1. 외국에 살고 싶다. 기왕이면 유럽에 살아보고 싶다.
2. 육체적 노동이나 감정 노동이 아닌 기술적인 일을 하고 싶다. 기왕이면 컴퓨터의 키보드를 타닥타닥 두드리는 일이라면 좋겠다.
3. 사람들 앞에서 스피치를 하는 것보다는 글을 쓰는 게 자신있다. 여러 사람을 만나야 하는 일보다는 소수의 사람과 소통하며 내 일에 혼자 일에 집중하는 시간이 좋다.
4. 아직까지는 비혼, 비출산을 생각하고 있지만 언젠가 생각이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육아를 할 수도 있고, 동물을 키우게 될지도 모른다. 재택근무가 가능한 일이라면 좋겠다.
5. 언젠가는 프리랜서로도 일할 수 있는 자유로운 직업을 갖고 싶다.
6. 한 번도 해외에 살아본 적 없는 내가 잘 적응하기 위해서는 한국과 문화가 비슷한 나라가 좋겠다.
7. 나는 배우는 것,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기왕이면 새로운 기술을 다양하게 접하고 자기개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8. 일에 대한 보람 뿐 아니라 금전적인 보상도 중요하다. 어느 정도는 한국보다 선진국이거나 비슷한 나라면 좋겠다.

리스트를 적고나서 쓱 하고 훑어보니 어딘가 부끄럽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한 번도 입 밖으로 난 유럽이 좋아, 라고 말한 적은 없지만 '유럽에 살아보고 싶다' 라니. 비혼을 생각하면서 동시에 육아를 생각하다니.
새벽 2시. 평소라면 '또 혼자서 재미있는 상상을 하고 말았네' 하고 잠이 들었겠지만 그 날만큼은 달랐다. 자, 그래서 이것들을 어떻게 실현시킬 건데?

1. 유럽. 안될 건 없지, 그치만 당장은 어렵다. 할 줄 아는 언어라고는 한국어, 일본어 조금, 그리고 영어 아주 조금.
2. 컴퓨터를 두드리는 일이라... 그럼 IT를 해볼까?
3. 개발자가 되면 아마 비슷한 상황에서 일할 수 있지 않을까?
4. IT 회사 중에는 재택 근무를 하는 회사가 많다고 들은 것 같은데.
5. 프리랜서.. 프리랜서라...
6. 일본, 중국... 역시 시작은 아시아가 좋겠지
7. IT라면 매일 신기술이 쏟아지기는 하지...
8. 일본, 독일, 싱가포르,...

자, 그렇게 대충 코멘트를 달고 보니 당시로서 가장 현실성 있는 답이 나왔다. 일본, 그리고 IT. 그러고 보니, 일본으로 IT 취업을 한다는 사례를 꽤 많이 들었던 것 같았다. 비전공자여도 컴퓨터 공부를 해서 취업하는 경우도 많다고 하던데. 게다가 일본은 한국과는 반대로 구인난이 심해서 취업 문이 활짝 열려있다고도 들었다. 일본어는 조금 할 줄 알고, 여행도 몇 번 다녀왔으니 나에게는 문화적으로도 꽤 친숙한 나라임에 분명하다. 한국과 가까우니 만약 잘 적응하지 못하더라도 쉽게 들어올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결론이 났다. 일본으로 IT 취업을 하는 방법을 알아보자. 라고.

어쩌다 비전공자인 나는 IT로 일본 취업을 하게 되었을까? (끝) 

2019년, 마침내 일본에 취업한 후 롯본기에서 할로윈을 보냈던 날. 일본 입국 후 처음 본 도쿄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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