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이면 내가 입사를 한 지 1년이 된다. 처음 전직에 도전했을 때, 일본에 입사했을 때, 그리고 일본에 취업하기로 마음 먹었을 때. 기억의 조각조각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단 한번, 아주 어렵게 방향을 틀었던 그날부터 내게는 줄곧 행운의 여신이 함께하는 것 같았다. 2015년, 꽤 높았던 학점, 어학점수, 경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번번히 경력이직에 실패했었다. 내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거절을 당했던 한국에서의 마지막 인터뷰 이후로 다섯 해가 지났고, 나는 일본에서 현재의 회사에 지원했다. 그들은 비전공자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경험과 소통 능력을 가졌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나의 자세가 훌륭하다고 했다. 게다가 배우며 성장하기에 젊은 나이이기에 더없이 좋다고 했다.
어렵게 잡은 기회를 놓칠세라
"난 일본에서 대학을 나오지도 않았고, 전공도 아니야. 하지만 난 그게 나의 단점이라고만 생각하지는 않아. 아무 연관도 없는 환경과 나라에 오직 꿈을 이루기 위해 뛰어든 것이야말로 나의 도전 정신을 잘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하고 강력히 어필했다. 푸른 눈의 면접관들이 눈을 반짝이며 미소짓던 그 순간은 내게 여전히 짜릿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나는 평생을 꿈꾸던 유럽 회사의 일본 지사로 입사하게 되었다. 그것도 도쿄의 랜드마크인 시부야 한 복판. 그것도 일본에서 가장 최근에 지어진 화려한 건물의 꼭대기로.
모든 것들이 설렜다. 젠틀한 동료들도, 언제나 고마움을 표현하는 멋진 리더도. 내가 일에 만족하는지, 지루해하는지 늘 귀를 기울이는 회사의 시스템. 혹여나 일이 사생활을 방해하지는 않는지 개인의 놀고 쉴 권리를 가장 중요시하는 문화도. 남자도 여자도, 직급의 위아래도 없는 너무나 평등한 구조. 무차별 주의를 원칙으로 하는, 심지어 LGBT의 공식 커뮤니티를 가진 개방된 문화도. 능력에 따라 충분한 보상을 주는 투명함도. 더해서 튼튼한 재무 상태도. 모든 것들이 만족스러웠다.
그 만족과 설렘이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까, 하고 의심한 적이 있었다. 3개월 지나도 똑같을까, 1년이 지나도 똑같을까.
그러나 시간이 지날 수록 나에게는 감동과 고마움이 늘어날 뿐이었다. 리더는 늘 내가 필요한 부분에 대해 명쾌한 조언을 해 주었고, 내가 피로하거나 지치지 않도록 나의 휴식, 건강, 스트레스 상태를 늘 체크했다. 내가 방향을 잃지는 않았는지, 어떤 일이 무료하지는 않았는지, 더 배우고 싶은 게 무엇인지. 그런 리더와의 대화 후에는 더욱 더 일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세계 80개국에서 온 동료들. 우리는 출신도, 문화도, 모국어도 다르지만, 미팅을 할 때는 마치 친구를 만나 카페에서 수다를 떠는 것 같은 즐거움을 느꼈다. 비록 대부분의 미팅은 목소리로 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같은 배를 탄 사람들이 서로의 관심사와 지식을 공유하고 더 좋은 것을 만들어 나갈 때, 서로를 존중하고, 서포트하고, 결과물에 대해 고마움을 표현하고. 그런 보람과 성취는 내 인생에 처음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내게 출근을 위해 노트북을 켜는 순간은 때로는 유원지에 놀러가는 것처럼 두근거리는 일이기도 했다. 오늘은 굿모닝 하고 말을 걸어오는 동료에게 너네 나라 올림픽은 어떤 종목에 강하니? 하고 물어볼까. 스페인 동료에게 스페인어를 배워볼까. 일본인 동료에게는 일본어 유행어를 배워야지. 네덜란드 동료에게 오늘은 네덜란드어로 인사해야지. 일을 하는 순간이 일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재미있어서 야근인지도 모르고 일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최고 엔지니어를 포함해 매니저들이 우려를 했다.
"업무시간이 아닐 때는 오직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해. 일도, 공부도, 너의 쉬는 시간을 방해하지 말아야 해"
처음 경험해본 탄력근무제도 좋았다. 덕분에 나는 원하는 시간에 자유롭게 근무할 수도 있었다.
휴가 역시 원하는 날짜에 캘린더를 표시하기만 하면 된다. 그 누구도 내가 왜 쉬는지, 얼마나 쉬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내가 회사에서 배운 것들.
그 어떤 일보다도 나의 건강과 생활이 가장 우선임을 잊지 말 것. 기한이 있는 일들의 대부분은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 것. 너무 완벽하지 않아도 불안해하지 말 것. 너무 열심히 하지 말 것. 쉬고 싶을 때는 쉴 것.
어쩌면 정말로 당연한 진리인데, 왜 그동안은 모르고 살았을까?
그 어떤 차별도 없는 곳에서 늘 따뜻한 인사를 받으며 일할 수 있던 매 순간은 감동이었다.
문득, 과거의 내가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그때의 스스로에게 한없이 고마워지는 오늘이다. 1년 뒤의 나도 오늘의 나에게 고마움을 느낄 수 있도록. 앞으로도 스스로를 믿고 나아가야지.
그리고 이제는 나와 같은 도전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있게 용기를 내어 가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다행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만큼 조금은 떳떳하고, 조금은 여유로워진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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