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한일 관계'와 '불매 운동'으로 세상이 시끄럽다. 도로가에는 'NO JAPAN' 의 팻말이 즐비하고 더러는 커다란 현수막까지 걸려있는 경우도 있다.
오랫동안 염원해왔던 해외 취업에 성공하고, 출국을 준비중인 나를 줄곧 응원해주던 가족들도 내심 걱정하는 눈치다. 가족들과 주변인들에게 '일본 사람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 그다지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하고 적당히 둘러대기는 하지만,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나 역시 이런 상황이 불안하고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고등학교 때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처음 외웠던 것을 시작으로 나는 제2 외국어인 일본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한국과 비슷한 문법 체계와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했던 익숙한 한자 덕분에 일본어는 제1 외국어인 영어보다도 훨씬 더 흥미롭고 쉽게 다가왔다. 때마침 NHK 에서는 '더소년 구락부 (ザ少年俱樂部)' 라고 하는 쟈니스 소속의 남자 아이돌 그룹이 출연하는 음악 예능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었는데, HOT 와 GOD, 클릭비 등 1세대 아이돌들이 하나 둘 은퇴하고 있던 시점에서 '아이돌 덕질'에 대한 갈망이 자연스레 바다 건너의 미소년 남자 아이돌들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누군가 가장 쉽게 언어를 배우는 방법이 '덕질' 이라고 했던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며 노래와 춤을 추는 그 아이돌들은 일본어로 말하고 있었고, 나는 별다른 공부를 하지 않고도 시나브로 일본어를 듣고 말하는 것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국내의 대학에 입학하면서 우연치않게 일본에 갈 기회가 생겼다. 그 당시 JLPT 1급 자격증이 있었기 때문에 꽤 쉽게 단기 어학연수 프로그램에 선발되었고, 약 한 달 정도를 도쿄에서 생활했다. 드라마에서만 보던 것들을 실제로 마주하는 설렘이란 실로 대단해서, 그 무렵의 일기장에는 '내가 살아 있는 게 맞는지, 혹시 천국에 와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글까지 쓰여있을 정도였다.
당시에는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환율이 1300원을 웃돌던 시절인 데다 용돈을 타 쓰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비용을 아끼기 위해 2인 1실을 신청했다. 내 룸메는 근처의 전문학교에 다니던 홋카이도 출신의 한 살 많은 여학생이었다. 그녀는 매일 아침 식사를 마치면 로비에 있는 일간지를 방으로 가지고 와서 읽었는데, 표지에는 항상 북한(北朝鮮, 북조선)과 김정은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면 나는 그녀를 보고, '오늘도 김정은 이야기야?' 하고 물었고 그녀는 '응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했나 봐'라고 무심하게 대답하고는 했다.
그녀는 내가 룸메이트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는 연일 뉴스를 통해 부정적으로 보도되는 북한과 '원래 하나였다가 분리된 나라'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나마 소녀시대나 동방신기와 같은 한류 열풍의 주역들이 막 일본으로 진출하면서 K-POP 에 대해서 어렴풋이 들어본 정도가 한국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느 날 그녀는 '왜 한국은 일본을 싫어해?' 라는, 한국인에게는 너무나 기본적이고 당연한 질문을 해왔다. 나는 그녀에게 학창 시절의 교육과정과 매체들을 통해 접해왔던 일본 침략에 관한 역사적 지식들을 머릿속에 끄집어 모아서, 과거에 일본이 한국에게 얼마나 나쁜 짓을 해왔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 매체를 보고 일본의 교육 과정을 받아오면서 '잘못을 저지른 역사'에 대해는 배우지 못했던 그녀는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했다. 때마침 독도 문제로 다시 한번 한일관계가 민감하게 얽혀있던 시기였다. 나는 조선시대 때 안용복이라는 인물이 일본으로 건너가 울릉도와 부속 도서인 독도가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는 서계를 받아왔던 공적까지 얘기하면서 '독도는 우리땅' 이라는 주장을 덧붙였다.
갑자기 쳐들어온 옆 나라가 언어를 빼앗고, 문화를 빼앗고, 나라를 빼앗았는데 빼앗는 과정조차 너무나 처참하고 참혹해서 그 후손인 우리들조차 아직까지도 잊을 수 없다는 말에 그녀는 한 번도 배우지 못해서 잘 알지 못했다며 내게 사과를 했다. '그렇다면 독도는 역시 한국땅이 맞구나'하는 말과 함께.
그녀와 한달을 같이 지내는 동안 수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이날의 대화는 유독 내 머릿속에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일본어 배우기를 좋아하고 일본 여행을 종종 다녀오며 느꼈던 찝찝한 죄책감 같은 것들을 조금은 희석시켜주는 자기 위로가 되었다고 할까. '그래도 내 역사의식이 잘못되지는 않았으니까. 나는 일본인들에게 제대로 된 역사를 알리기 위해 애썼으니까' 하는.
처음 일본을 방문한 것이 2009년 여름이었으니까 올해로 딱 10년이 되었다. 짧지만 긴 시간동안 나는 학생에서 사회인이 되었고, 그 사이 유사 경력 단절과 부조리한 조직생활을 경험하면서 이다음의 커리어는 꼭 새로운 나라에서 도전해보겠다고 다짐했었다. 때마침 유례없는 인력난으로 여성에 대한 일자리를 확대시키며 제도적 차별을 없애고 개선을 시도하는 일본은 나에게 기회의 땅과도 같았다.
혹자는 나를 보고 '일본어도 하고, 일본 여행도 자주 갔으니까 일본이 좋아서 떠나는구나' 하는 생각을 품을 지도 모르겠다. 벼랑 끝에 내몰리는 심정으로 오롯이 나 자신만을 생각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으며 조국을 떠나기를 결심하기까지는 셀 수 없이 많은 고민과 방황이 필요했지만 그런 속 사정들을 알 리가 없으니 말이다.
일본에 가고, 사고, 먹는 것이 친일파라면 그들의 눈에는 내가 그렇게 비춰질 수 밖에 없겠지만, 그렇기에 스스로를 더욱 더 검열하고 공부하면서 긴장을 놓치지 않고 사는 것이 앞으로 내가 가져야 할 자세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가슴속에 남아있는 이 무겁고도 불편한 감정을 기꺼이 끌어안고 떠나기로 한다. 불안함도 나의 몫이고, 앞으로 맞닥뜨리게 될 위기도 나의 몫이라는 생각으로.
한국에 있는 동안은 국민 중 한 사람으로서 계속해서 불매운동을 지지하고 응원할 것이다. 그리고 일본에 가더라도 아픈 역사를 잊지 않고 늘 당당하고 용감하게 부딪히며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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